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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009의 게시물 표시

폭력은 폭력일 뿐 그 이상은 아니다

[최초 작성일자 : 2005-04-22] '사람을 때리는 짓은 나쁘다'라는 것은 절대다수가 인식하는 보편적인 통념이 되어 있다. 아니, 당장 형법만 봐도 폭력죄가 있지 않은가. 그 러나 이런 통념이 어떤 상황에서나 보편타당하게 적용되는 것이냐 하면 - 물론 여러분들도 아시겠지만 - 절대(!) 그렇지 않다. 폭력을 휘두르기 위해서는 갖가지 명분을 내건다. 폭력 그 자체의 '나쁘다'를 상쇄하기 위해 상대방의 악행이나 결점을 잡고 늘어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공부를 안했다든지, 말썽을 부린다든지, 말을 안 듣는다든지, 기분나쁘다든지 등등. 그렇다면 사람들은 기타의 제재수단 대신에 왜 폭력을 휘두를까? 현 명하고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폭력 대신에 얼마든지 다른 제재수단을 쓸 수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런 사람은 전체 인구 대비의 극소수에 불과하다. 즉, 상대방에게 가장 원초적이고 즉각적인 '아픔과 공포감'을 제공하는 폭력을 아무 생각없이 선호하기 때문이다. (물리적인 폭력에는 반드시 언어폭력이 뒤따른다.) 언급한 대로 폭력이란 것이 원초적이고 즉각적이다 보니 '내가 당한 고통을 너도 똑같이 (내가 당한 고통이 같든 다르든) 맛봐라' 따위의 분풀이가 많고, 상대방의 반성과 문제 해결에는 가장 동떨어진 수단이다. 특 히 '체벌('폭력'의 미화어)이 교육적 효과가 있다'라고 철썩같이 믿는 성인들(부모, 교사 등)의 '예외적 폭력인식'은 폭력의 본질을 호도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지금 당장 자신의 어릴 적으로 돌아가 보자. 조금만 사고를 쳐도, 조금만 실수를 해도 물리적, 언어적 폭력을 방어할 새도 없이 감내해야 하지 않았던가. (이는 교육적으로 성숙해지기보다는 트라우마로 남게 되에 인격형성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건 말해 뭐하겠는가. 쇠귀에 경읽기인데.) 결국 폭력이란 교육이니 카리스마니 뭘로 포장해도 '인간이 저지르는 가장 무식하고 덜 떨어진 행위의 기초...

민족과 문화 - 문화 방향의 도착(倒錯)

[최초 작성일자 : 2005-04-17] 월간중앙 1974년 1월호에 길현모 씨가 쓴 글이라고 합니다. (정작 퍼온 것은 DC) 저 당시에 벌써 저런 글이 나왔다는 게 감탄스러울 뿐입니다. 뭣도 모르고 민족문화 운운하는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한국 최초의 글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글이 깁니다. 펼쳐서 보려면 클릭하세요. 모든 정책이 그러하듯이 문화 정책이란 문화라는 것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토대로 해서만 올바르게 수립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란 결코 용이하게 이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필 자는 여기서 오늘날의 우리의 문화 방향이 올바른 방향을 지향해 나가고 있는가, 아니면 그 반대 방향인가를 검토해보고자 한다. 물론 표제가 이미 말해주고 있듯이 필자의 이 문제에 대한 견해는 대단히 비판적이다. 필자는 자신의 비판적인 견해가 잠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기를 바란다. 그런 까닭에 다만 결론뿐만이 아니라 지면이 허용하는 한 자신의 논거를 윤곽이나마 제시해보려고 노력하였다. 문화란 원래 인류의 공동의 재산이다. 거기에는 국적이 붙어 있는 것도 아니고, 국적을 붙일 수도 없다. 설사 국적을 붙여본다 한들., 기득권이 행사될 수도 없고 특허나 독점 등의 권리가 설정될 수도 없는 문화에 대해서는 그것은 완전히 무의미한 일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서 문화는 군사력이나 정치 권력에 의하여 일국민의 독점물이 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오직 그것은 그 기원이나 출처 여하를 막론하고 그 힘을 필요로 하고 그 가치를 이해할 줄 하는 자들만이 주인이 될 수 있는 개방된 보고인 것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들은 문화 국민이라는 것을 말할 때에 그들이 누리고 있는 문화의 국적이나 계보나 고유성을 기준으로 삼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국민 복지에 이바지할 수 있는 문화적 총력량만이 유일한 기준이 될 수 있을 뿐이다. 이 와 같은 명백한 사리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 나라에는 이미 전시대의 신화처럼 퇴색해 버린 문화의 고유성과 문화의 순수성에 대한 숭상이 새로...

새로운 것과의 조우

[최초 작성일자 : 2005-04-10] 우리는 살면서 심심찮게 '새로운 것'과 조우한다. 그 새로운 것은 그것 자체 때문에,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나 태도에 따라 대접은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여기서 언급하는 '새로운 것'이라는 말은 물건, 사람, 지식, 사상, 기타 등을 모두 아우른다.) '새로운 것'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그 사람의 성향을 알 수 있게 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와도 같다. 마치 미래의 문명을 주도하는 첨병의 역할로 인식하고 기대를 거는가 하면, 정체를 알 수 없고 괴상망측한 흉물로 인식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시간이 지나 태도가 바뀌는 경우도 많으며, 소수이지만 중립적인 경우도 분명히 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사회가 발전하고 외부와의 교류가 엄존하는 한, '새로운 것'의 창궐과 유입을 피할 수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새로운 것'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는 너무나도 자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것'을 감정적으로 싫어하는 사람들이 아직까지 많은 실정이다. (대개 늙은 사람들이 많음) 필경 자신도 '새로운 것'에 적응하려 했으나 실패했다거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상적 신념이나 인생관과 괴리를 일으켰다거나 둘 중에 하나이리라. 이런 사람들일수록 '개방적인 사고'가 절실히 요구된다. 앨빈 토플러가 주창한 '제 3의 물결' 외에도 언제 '제 x의 물결'이 쓰나미처럼 현대 문명을 휩쓸고 지나갈 지 모르기 때문이다. (쓰나미와 공통점이라면 인간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다는 것 정도) 언제까지나 '말세야 말세'라고 한탄해봤자 두번다시 과거로 회귀할 리 없다. ……라고 써봤자 그들에게 선택할 수 있는 건 '새로운 것과의 적응' 또는 '부적응자의 게토(ghetto)화' 외에 제3의 대안은 없어보이는 것이 앞으로 미래사회가 직면할 문제점...

과학과 논리 예찬

[최초 작성일자 : 2005-04-04] 우리는 과학과 논리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틈을 비집고 편견과 당연한 것 - 진리라는 몹쓸 것들이 암암리에 횡행하고 있다. 과학적/비판적 사고가 결핍될수록 더 쉽게 침투한다. 편견이라는 것이 잘못된 사고방식이라는 공감대는 확산되었을 지 몰라도(그나마 개선하려는 노력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당연한 것 - 진리는 어떠한 비판도 용납되지 않기 때문에 문제의 심각성이 크다. 특히 특정 종교를 믿는 사람들 중에서 이런 현상이 자주 일어난다. 더욱이 그들은 과학과 논리라는 것에 광적인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이 세상에 과학과 논리로만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많다고 대충 얼버무리기만 할 뿐, 그 이상으로 나가면 그들은 매우 극단적인 반응을 보인다. 남을 제압해야겠는데 그러한 이유나 명분이 부족하니(설령 있다 하더라고 그들에게는 대단히 불리한 것만 있으면) 궁여지책으로 폭력에 호소한다. 또한, 과학과 논리에 대해 컴플렉스도 있어서, 상대에게 지지 않기 위해 열심히 과학과 논리로 포장한다. 언제나 그렇듯, 쉽게 논파당해 파멸한다. 이들의 끼워맞추기 실력으로 퍼즐 대회에 출전했으면 어떨까? 과 학과 논리 자체에 딴지를 거는 경우도 있다. 주로 이들이 알고 있는 이미지화된 과학과 논리를 공격하는데, 과학과 논리는 명제화된 특정 현상이 '왜',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탐구하는 연구과정일 따름이다. 과학적/논리적 비판과정에서 '왜'나 '어떻게'라는 질문이 빠지면 명제화된 특정 현상을 억지로 머릿속에 집어넣는 행위와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이 늘상 하는 대로. 덧붙이자면 그들은 '왜'라는 의문부사 또한 대단히 싫어한다.) 그들을 잘못된 사고방식에서 구제할 방법은 과연 없을까? 그냥 '구제불능의 대책없는 사람'으로 취급하여 경원시해야 할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이들을 그냥 내버려두면 반드시 피해자가 나온다는 것이다. ps. 비판과 비난은 ...

답답한 사람들

[최초 작성일자 : 2005-03-20] 관련기사 : 反日 `감정적 대응'에 우려 목소리 지금 '독도의 날' 제정과 관련하여 한반도는 '반일 스트라이크'로 들끓고 있다. 일본대사관 앞 항의시위를 필두로 일본제품 불매, 일본인 출입금지 배너, 단지(斷指)와 분신(焚身)까지 자행하고 있다. 그만큼 국민적인 분노가 폭발했었으리라. 시위하는 모습만 보면 지금이 '절체절명의 위기'일 지도 모른다. '감정적인 반응 대신에 이성적으로 대응하자'라는 설득은 애석하게도 소수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도대체 뭐가 이성적인 대응이냐?'라는 비아냥을 받기 십상이다. 까딱 잘못하면 매국노로 다굴당할지도 모를 일이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일본 우익도 jot같지만 한국민의 대응방식은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일 단, 그들은 일본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일본에 대한 지식이나 접근하는 방법은 대단히 피상적이며, 지금 일본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으며 어떻게 굴러가는지, 또 우익에 대한 정체에 대해서는 애써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아니, 기분나빠서라도 손도 대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게 이렇게 열받았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 미안하지만 이런 태도로는 절대로 문제해결이 불가능하다. 아니, 분노의 표출에만 신경을 집중한 나머지 근본적인 문제해결을 도외시하고 있다. 사정이 이러니 어찌 음모론이 없을 수 있겠는가? '독도의 날 제정'이 침략의 준비 단계로 생각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가장 결정적인 것이 2001년경 박찬종이라는 사람이 '2002년 1월 22일 독도가 일본에 넘어간다'라는 주장으로 57만명에 이르는 서명을 받아낸 일이다. 박 찬종 사건에서 알 수 있듯, 사실확인 안된 음모론 전파는 우리에게 여러모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또한 위에 언급한 인간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일본내 일반인들까지 도매금으로 넘기며 감정의 골을 절대화하는 것은 ...

우익과 찌질이의 공통점

[최초 작성일자 : 2005-03-17] 1. 예전에는 그런대로 정신이 멀쩡한 사람들이었다. (사람 바뀌는 건 한순간) 2. 평소에 관심을 못받아서 그런지 사람들의 관심을 받으려고 온갖 지랄을 다 한다. (다시말해 왕따) 3. 관심을 끌려고 하는 발악이 참으로 사악하기 짝이 없다. 4. 같이 맞대응해주면 상당히 좋아한다. 5. 무시하면 더욱더 사악하게 도발한다. 몇번하다 지겨우면 그만두는 경우가 많으나, 잊을 만 하면 또다시 나타나주는 센스를 보일 때도 있다. 6. 낚시질의 고수다. 몇몇 다혈질적인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능력이란…… 7. 자신이 저지르고 있는 짓이 아주 자랑스럽다고 생각한다. 8. 논리부족은 기본. 상상력은 옵션. 심지어는 기본적인 언어능력조차 떨어지는 경우도 있다. 9. 대개 초딩 아니면 상당히 나이가 많다. 10. 겉으로는 대단히 위풍당당하다. 그러나 궁지에 몰리면 비굴해지거나 아예 자멸한다. 11. 세상을 보는 눈이 그렇게도 명쾌할 수가 없다. 자기편 아니면 모두 적이다. 12. 빽이 있는 경우 상대하기가 더욱 골치아파진다. 13. 혼자서는 절대로 오프라인에서 대놓고 도발하는 일이 없다. 빽이 있어줘야 한다. 14. 이미 공공의 적이다. 15. 죽기 전까지는 어떻게 손을 쓸 대책이 없다. 다시말해 구제불능.

감정의 획일화와 정신병자

[최초 작성일자 : 2005-03-14] 우리는 획일화된 사회에서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규격품부터 시작해서 건축물의 모양은 물론이고, 사람의 생김새나 심지어는 생각까지 표준화하는 세상에서 그 표준에 이질적이 되면 소외와 다굴을 각오해야 했다. 그런 상황이니 1990년대를 지배한 사상인 "개성-튀고 싶다"가 나온 것은 그다지 이상한 현상이 아니리라. 그리고 지금은 남에게 과시하기 위한 "개성"을 넘어 지금은 자기만족 차원에서의 "다양성"이 지배하는 시대로 넘어가고 있다. 예전에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사상인 "좌파"가, 그리고 "중도"가 전통적인 우파와 대립하면서 공존하는 세상인 지금에 와서도 획일화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감정의 획일화 이다. 이 말만 보고는 무슨 말인지 감이 안 잡히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예를 들어, "웃기는 (영화, 드라마, 만화 등)을 보면 무조건 웃어야 하고, 슬프거나 감동적인 것을 보면 무조건 울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획일화된 감정에 따르지 않는 사람은 타인이나 소속집단에 의해 배척과 다굴을 당하게 되며, 심지어는 인격적인 모욕을 당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획일화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사람들은 일단 "감정 표현이 서투르다", "감정이 메마르다"는 비난을 받는다. 더 나아가서는 정신분열증 환자(전자의 연장)나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뒷배경이 수상한 자 또는 간첩(후자의 연장) 등의 취급을 받게 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내가 우니 너도 울어라, 안 그러면 사람취급 안해주겠다"라는 것이다. 대개 감정의 획일화를 강요하는 사람들은 대개 특정 대상에 대한 표준화된 감정에 휩쓸려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런 사람들이 개그물이나 감동물을 보면서 표준화된 감정 외에도 얼마든지 다양한 감정을 표현할 수 있으며, 또는 전혀 감정을 표현하지 않을 자유 또...

개인정보를 요구하는 사회

[최초 작성일자 : 2005-03-09] 단순히 인터넷을 연결하기 위해서가 아닌, 당당한 한 사람의 네티즌이 되기 위해서는 과연 무엇을 해야 할까? 그것은 바로, 개인정보(특히 주민등록번호) 를 까야 한다는 것이다. 메일 서비스를 필두로 카페(클럽)나 기타 대형(특수) 서비스를 이용하려면 개인정보를 까는 것이 예전부터 관행화되었기 때문에 아무 거리낌없이 개인정보를 내놓았다. 홈페이지가 주류를 이루던 1998~2001년에는 누구나 개설된 게시판이나 방명록에 들어가서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었으며, 고정닉(DC적 표현)을 중심으로 초보적이나마 커뮤니티를 형성했었다. 그러나 카페(동호회), 미니홈피 중심으로 재편된 지금에는 게시판에 글을 적거나 심지어는 접속하기만 해도 일일이 회원가입을 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개인정보를 내놓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런데, 회원가입하는데 개인정보를 왜 요구하는가? 그것도 필수항목으로. "왜"라는 질문에 속시원하게 대답할 줄 아는 사람은 아직까지는 없다. 회원 입장에서는 개인정보를 내놓는 일은 상당히 위험한 일(내키지 않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커뮤니티 주인이나 관리자는 편리한 회원 관리라는 이유 하나로 개인정보를 요구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리고 그것이 습관화되다 보니 어딜가나 개인정보를 내놓지 않고는 정상적인 인터넷 활동이 불가능해질 지경이다. 외국의 경우, 주민등록제가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아이디나 주소, 이메일만 적으면 손쉽게 회원가입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실명, 주민등록번호, 전화번호는 필수항목으로 들어가 있고, 주소도 우편번호는 데이터베이스화되어 있다. 심지어는 개인의 관심사까지도 선택항목으로 요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지금 한국의 인터넷 환경은 외국인의 배제로 인해 여느때보다도 순혈주의가 완벽하게 이루어져 있다. 그럼 개인정보를 까야 하는 진정한 목적은 무엇일까? 회원 관리? 데이터베이스 마케팅? 회원 확보로 광고주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서? 그냥 수집하...

극기훈련과 '나 자신'의 소중함

[최초 작성일자 : 2005-02-17] 성공하기 위해서, 속세의 헛된 망령을 떨어내고 진정한 사람이 되려면 이따금씩 나 자신을 이기라고 한다. '극기 훈련'이라는 말도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생긴 말이리라. 나 자신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육체적인(가끔가다 정신적인) 고통의 수반을 절대시하며,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평생을 인생의 패배자 또는 비인간(非人間)으로 취급하기 십상이다. 물론 여기서 의미하는 '나 자신'이란 '헛된 욕망에 물든 나약한 정신상태'를 의미한다. 따지고 보면 '나 자신'을 극단적으로 매도하는 상당히 모욕적인 표현 이 아닌가. (사실 여부를 떠나서라도) 그런데 한가지 묻고 싶다. '나 자신'과 싸울 상대는 과연 누구일까? 육체의 기능이 치사할 정도로 상실하면 죽음에 이르게 되지만, 그 때까지는 나를 살아가게 하는 하드웨어이자 소프트웨어인 '나 자신'과는 떼놓고 생각할 수 없다. 배우고 경험해서 얻은 데이터야 망각해서 잃어버릴 지언정,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나 자신'을 포맷하거나 기변(機變)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각자의 하드웨어/소프트웨어야 다르겠지만, 최소한 그것이 없이는 인간은 살아갈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나 자신'은 최고의 가치이자 그 자체로도 소중하다. (하드웨어랑 소프트웨어 둘 중에 하나라도 없으면 인간이나 컴퓨터나 움직일 수 없다.) '극기'라는 표현대로 외부적인 힘이 '나 자신'을 이긴다면 죽거나 식물인간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나 자신'을 이기려고 하는 상대는 결국, '나 자신'을 사용할 수 없게 되는 상태에까지 이르게 하려고 할 것이다. 그 상대의 정체는 아무래도 '나 자신'을 죽거나 식물인간으로 만드는 여러가지 요인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범위가 너무 포괄적이어서 명확한 실체가 드러나지 않을 뿐. 극기 훈련장으로 가서 엄...

판타지의 조건

[최초 작성일자 : 2005-01-30] 작품마다 다르겠지만, 여기서는 판타지의 구성요소 중 가장 평균적인 것을 모아 보았습니다. -지형적 요소- 거의가 대륙임을 표방하고 있고, 몇몇 나라로 갈라져 있기는 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최소한 바다를 끼고 있고, 지도 외곽에는 거대한 숲이나 산맥으로 인해 바깥 세상과는 차단되어 있는 형태를 취하는 부분이 반드시 있습니다. (섬으로 된 형태는 드문 편) 외곽의 산지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지형은 대체로 평탄하며, 해발 2000미터를 넘는 산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큰 강은 드문 편이고, 중소규모의 하천이 주종을 이룹니다. 희한하게도 사막은 많이 보입니다. -기후적 요소- 판타지 세계에서는 기후변화를 좀처럼 겪을 수가 없습니다. 1년 내내 화창한 봄 날씨만 있으며, 비나 눈은 커녕 흐린 날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고산지대에는 눈보라가, 사막지대에는 모래바람이 간간히 불어오긴 합니다만 사람사는 취락이나 도시에서는 날씨 변화가 절대(!) 없습니다.태풍이나 지진이 닥치면 어떻게 되는지 실로 볼 만하겠군요. 왜 날씨변화가 없냐면…… 여자들 노출은 시켜야 되거든요. -취락의 형태- 농촌의 경우에는 전형적인 유럽의 시골풍경이라고 할 만합니다. 광활한(?) 농지 중간중간에 몇 가구(규모가 크면 몇십 가구)씩 모여 마을을 이루고 있고, 좀 더 커지면 지방도시가 형성됩니다. 수도의 경우에는 항상 성(城)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형성되어 있으며, 중간에는 왕의 거주지이자 통치업무를 관할하는 궁(宮)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내성으로 둘러싸여 있는 경우도 있음) 농촌은 항상 한적하고 조용하며, 도시는 번잡합니다. 또한 단층 목조건물이 주류를 이루어 상대적으로 낙후해 보이는 농촌에 비해, 도시에는 2~4층 높이의 석조건축물이 들어서 있는데다, 큰 길에는 항상 시장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정치형태- 공화제는 드문 편이며, 군주제가 대다수를 이룹니다. 거기다가 입헌군주제도 아니어서 왕(또는 황제)의 권한이 상당히 강한 편입니다. ...

공포의 대상 - 그들은 과연 어디로 갔을까?

[최초 작성일자 : 2005-01-22] 지금으로부터 그리 멀지는 않은 옛날에는, 갖가지 허깨비랑 요물들이 사람들을 공포에 몰아넣었었다. 드라큘라같이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도, 지역마다 다르겠지만 xx귀신이니, yy유령이니 하는 것들은 그때당시에는 전세계인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지금도 그 나라를 상징할 만한 국가대표급 귀신들이 널려 있는 실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귀신이나 유령을 쫓기 위해 갖은 방법을 궁리해 내지 않을 수 없었다. 굿을 한다던지, 기도를 한다든지, 주문을 왼다든지, 엑소시스트를 부른다든지 하는 방법은 널리 알려진 방법이었다. 그만큼 옛날 사람들은 유령이나 귀신에게 많이 시달렸으리라. 그러나, 산업화가 진척되어 예전에는 상상도 못 할 문물이 전세계로 확산되면서 과학주의나 논리주의가 현대인의 사고방식을 지배하면서 이런 허깨비의 출현빈도는 눈에 띄게 줄었다. 최소한 문명화된 곳에서는 귀신이나 유령으로 대표되는 요물들은 철저히 공상 속의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옛말에 '도시에서는 귀신이 날뛰지 못한다'라는 말이 있다. (한국에서만 놓고 본다면) 7대 도시는 말할 것도 없고, 어지간한 곳은 죄다 개발되어 크고 작은 도시가 난립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개발되어 쫓겨난 귀신들은 과연 어디로 갈까? 상대적으로 개발이 안된 강원도나 경북 산간지대로 모여들까? 아니면 개발되면서 소멸해 버린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나름대로 사람들의 무시와 편견 속에서 도시 생활에 적응하면서 힘겹게 버티고 있지 않을까? 그들은 과연 어디로 간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