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거리의 정체성
●●● 기술어구는……이름과 동의어가 아니다. S. 크립케 〈이름과 필연〉 비트겐슈타인의 기술어구론에 대한 크립케의 비판. 요점은 이런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고유명사의 의미는 그 인물에 대한 기술(記述)의 총체다. 가령, ‘진중권’의 의미는 “독일에 가 박사학위도 못 따고 돌아와”, “그 분풀이로 유명인들을 공격해”, “제 이름을 날리고 돈을 버는” “인격 파탄자”(〈조선일보〉독자들), 혹은 “반동적 의지에 사로잡혀 자유주의를 배반한 전투적 자유주의자”(철학자 이진우), 혹은 “자기 분야에서 변변한 저서도 없이 평론가 행세를 하며” “검도 1단의 실력으로 검도 5단에게 대드는 지적 파파라치”(소설가 이문열)가 될 것이다. 이 정도의 기술어구들을 들으면 나를 아는 이들은 금방 내 얼굴을 떠올릴 게다. 반면 크립케는 고유명사의 의미가 기술어구의 총체로 환원될 수 없다고 본다. 즉 진중권이 설혹 자랑스레 박사학위를 따고 돌아와 제 본질을 배반하고 조신하게 처신하고 있어도, 그 ‘진중권’은 변함없이 1963년에 태어난 그 인간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나는 “사회적 관계의 총체”일까? 아니면 그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존재일까? 현재의 내 몸에서 그 모든 사회적 관계들을 걷어내면 고깃덩이만 남을 게다. 그렇다면 나는 사회적 관계의 망을 둘러쓴 양파일 뿐이다. 반면 크립케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기술어구로 표현되는 사회적 관계의 양파껍질을 다 벗겨도 ‘진중권’은 여전히 진중권이다. ‘진중권’은 단지 양파껍질의 합이 아니라, 그 껍질 아래에 깔려 있는 어떤 실체(?)다. ‘진중권’이라는 실체는 일단 태어나면 후에 성인이 되든, 개새끼가 되든 여전히 진중권이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말대로 그 실체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사회적 관계의 망 속에 들어가, 정체성을 갖게 된다. 이는 부정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사실. 그럼 문제는 딱 하나. ‘내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내가 얼마나 주체적 선택을 하느냐’이다. 내 몸을 감싸고 있는 정체성 중에 어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