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성장은 어떤 문제점을 남겼나
한국경제가 이룩한 고도의 압축성장은 그 자체로 대단한 일이지만, 정상적인 과정을 생략한 압축성장 과정에서 여러 가지 구조적 문제점을 내포하게 된 것도 부인할 수 없다. 바로 이러한 구조적 문제가, 우리 경제가 자생적 성장의 틀로 전환하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문제점이 자생적 성장으로의 전환을 가로막고 있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1.대외의존도가 높은 경제구조를 초래하였다.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인 경제성장이 시작된 것은 1960년대 초반부터였다. 그러나 축적된 자본이 없는 상태에서 의욕적으로 고도성장을 추진하다 보니 외국자본을 도입하는 것은 필연적이었으며, 나아가 도입한 외국자본의 원리금을 상환하기 위해서 수출주도형 성장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전략이 당시 세계적으로 고조된 자유무역 분위기와 맞물려 크게 성공한 것은 앞의 글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시장수요의 상당부분을 수출, 즉 해외시장에 의존하게 되면 국내경제가 외국 경제상황에 따라 민감하게 변동하게 된다. 우리나라 수출의 절반 이상을 미국 시장에 의존하던 시절에는 ‘미국 경제가 재채기를 하면 한국 경제는 감기에 걸린다.’하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였다.
최근에는 국내시장 규모도 다소 커지고 수출대상국도 다변화되었지만, 아직도 국민총생산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율이 30%를 초과하고 있다. 이처럼 수출의존도가 높아서 경제가 해외경기에 따라 민감하게 변화하면, 그만큼 우리 경제에 대한 통제능력이 떨어지고 국제경제 관계에서 우리의 협상력이 약해지게 된다. 그 동안 미국과의 통화협상에서 종국에 가서는 양보하고 마는 것이라든지, 환율변동에 따라 경제상황이 민감하게 변동하는 모습 등은 그 전형적인 예이다. 이것은 결국 경제의 자주성이 떨어짐을 의미한다.
더욱이 우리나라의 수출은 기계설비와 기술을 외국에서 도입하고, 생산에 필요한 원료나 중간재도 역시 외국에서 도입하여, 저임금 노동력을 활용하여 최종제품을 만들어 이를 다시 수출하는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것을 보통 ‘가공무역형 수출’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수출의존도가 30%를 초과하고 있지만 수입의존도(국민총생산에 대비한 총수입액의 크기) 또한 30%를 초과하고 있으며, 총수입액 중에서 중간재와 자본재가 90% 이상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수출이 가공무역형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참고로 일본의 경우에는 총수입액에서 중간재와 자본재가 차지하는 비중이 75%에 불과하다.
이처럼 수출이 가공무역형으로 이루어지면 수출이 늘어달 때 수입도 함께 늘어난다. 이것을 보통 ‘수입유발형 수출 구조’라고 하는데, 이렇게 되면 수출이 경제활동에 미치는 파급효과도 적을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수출이 증가하면 수출부문에서 활동하는 기업의 생산규모가 증가한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이 기업이 필요로 하는 중간재나 기계를 생산하는 기업의 생산활동 규모를 증대시키며, 그 파급효과는 계속 다른 기업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연쇄적인 파급효과야말로 수출이 경제성장에 기여하게 되는 중요한 통로이다. 그런데 수출품의 제조에 필요한 중간재나 기계를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게 되면 수출이 경제성장에 미치는 파급효과는 그만큼 적어질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자본재나 중간재의 높은 해외의존도로 말미암아 수출을 선도부문으로 한 누적적 성장매커니즘이 자리잡기 어렵게 되었다는 것이다.
2. 부문간 불균형이 심화되었다
후진국의 경제개발 방식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균형성장 전략’이고 다른 하나는 ‘불균형성장 전략’이다. 균형성장 전략은 국민경제의 모든 부문이 골고루 성장하도록 국력을 안배하는 전략이고, 불균형성장 전략은 성장가능성과 파급효과가 가장 크다고 생각하는 부문에 국력을 집중하여 그 부문을 성장시키면서 그것의 파급효과에 따라 다른 부문을 개발하는 전략이다. 우리나라는 ‘수출주도형 공업화’라는 말이 시사하듯이 수출을 위한 공업부문에 집중하는 불균형성장 전략을 취해왔다. 그 결과 농업과 공업 간, 그리고 공업 내부에서도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격차가 크게 벌어지는 불균형이 나타나고 있다.
먼저 농업과 공업 간의 불균형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전체 산업에서 40% 이상의 비중을 차지하던 농림어업부문은 고도성장 과정에서 10% 이하로 축소되었다. 물론 성장을 위해서는 공업화가 유리하고, 그 과정에서 농업의 비중이 축소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농업과 공업이 상호유기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다는 점이다. 즉 공업부문이 성장하면서 농업부문의 잉여인력을 흡수하고, 이것이 농업부문의 생산성을 상승시킴으로써 다시 공업부문의 자본축적에 기여하는 상호작용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이러한 자연스러운 과정을 거치지 않고 농업을 희생시키면서 공업이 성장함으로써 양자간 균형이 과도하게 파괴된 데 문제가 있다. 공산품의 수출경쟁력이 저임금 노동의 활용에 바탕을 두고 있으므로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도시근로자의 생계비를 낮추지 않으면 안 되었고, 이를 위해서 곡물의 가격을 낮은 수준으로 묶어놓을 필요가 있었다. 곡물 가격을 정상가격보다 낮은 수준으로 억제하는 한 농업의 수익성이 떨어져 농업부문이 과도하게 위축될 수밖에 없다.
농업부문의 위축은 동시에 농촌의 몰락을 초래하였다. 오늘의 농촌 현실을 보자. 노인들만 사는 집이 반을 넘고, 어린애 울음소리가 끊긴 지 오래이며, 초등학교는 계속 폐쇄되고 있다. 한마디로 참담한 지경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농업소득이 저하되더라도 새로이 생성되는 공업부문을 농촌에 위치시켜 농외소득을 증대시키면, 농업이 위축되더라도 농촌은 살 수 있다. 그러나 그 동안 농외소득을 증가시키는 데도 실패함으로써 농업의 위축과 함께 농촌도 몰락하게 되었다. 농업의 위축과 농외소득 증대의 실패가 도시와 농촌의 불균형을 초래한 것이다.
공업 내부에서도 재벌 및 대기업의 성장과 중소기업의 위축이라는 또 다른 불균형이 나타나고 있다. 30대 재벌이 우리나라 광공업 총매출액의 40% 가까이를 차지하고 있는 반면에, 수적으로 보아 우리나라 기업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소기업은 제조업 총부가가치의 45%를 점유하는 데 그치고 있다. 경쟁력 있는 기업은 더욱 커지고 그렇지 못한 기업이 도태되는 것은 자본주의 경제의 일반적 현상이다. 따라서 경제성장 과정에서 대기업의 비중이 증대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미국이나 일본의 경우 중소기업이 제조업 총부가가치의 60% 가까이 차지하는 것을 볼 때, 우리나라 대기업·중소기업 간의 불균형은 그 정도가 지나치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대기업·중소기업 간에 불균형이 심화된 것은, 그 동안의 성장 과정에서 정부가 시행한 산업정책에 그 원인이 있다. 정부는 불균형성장 전략의 일환으로 특정산업을 전략산업으로 선정하여 집중적으로 지원하였다. 1960년대의 경공업과 1970년대의 중화학공업 및 해외건설업은 대표적인 전략산업이었다. 특히 이 과정에서 우리 정부는 그 산업을 담당할 기업까지 선별하였다. 여기서 선별된 기업은, 공장 건설에 필요한 차관자금에 대한 정부의 지불보증은 물론이고 국내은행에서 운전자금도 지원받을 수 있었다.
정부는 기업을 선별할 때 공평성을 고려하여 기존에 지원받지 않은 기업을 선정하기보다는, 안전성을 우선하여 과거 경영실적이 우수한 기업을 선정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급속한 성장 과정에서 새로운 산업이 속속 전략산업으로 등장하였고, 한번 성공한 기업은 계속해서 그 새로운 산업의 담당자로 선정되는 경향이 있었다. 오늘날의 재벌 및 대기업 위주의 경제구조, 달리 표현하면 중소기업이 취약한 경제구조는 이러한 과정을 거쳐 형성된 것이다.
이처럼 농업과 중소기업이 극도로 위축되어 산업간 불균형이 극심한 상태에서는 자생적 성장의 발판을 갖추기 어렵다. 그 이유는 다음의 세 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첫째, 중소기업이 약한 경제는 자생적 성장을 위한 독자적인 기술개발 능력을 가질 수 없다. 물론 대기업에서도 기술향상이 이루어질 수 있고 또 실제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외국의 경험을 보면 신기술이 개발되고 신제품이 착상되는 곳은 대기업도다는 중소기업이 많다. 실제로 미국의 경우 반도체, 컴퓨터, 소프트웨어 등 첨단기술의 발명은 실리콘밸리의 중소기업이 선도하고 있다. 또한 중소기업의 생성과 발전은 기업간 경쟁을 자극하여 기술개발 및 품질향상 노력을 가속화시키기도 한다.
둘째, 각 산업부문간의 유기적 관련을 통해 한 부문의 성장이 다른 부문의 성장을 유발하는 누적적 성장매커니즘을 기대할 수 없다. 자생적 성장의 길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공업의 성장이 농업의 성장을 유도하고 농업의 성장이 다시 공업의 성장으로 이어질 수 있어야 하며, 대기업의 성장이 중소기업의 성장을 유발하고 중소기업의 활력이 다시 대기업의 경쟁력을 향상시키는 누적적 성장매커니즘이 정착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셋째, 농업의 극심한 위축은 경제의 자주성을 해치게 된다. 1970년만 해도 80%에 달했던 식량자급률이 농촌의 피폐로 1992년에는 34.3%로 급격히 떨어졌고, 이러한 추세는 우루과이라운드의 타결로 농산물 수입이 증가하게 되면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농업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가 국민들에게 식량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일인데, 이것을 보통 농업의 ‘식량안보 기능’이라고 한다. 세계 곡물시장의 50%를 거대 곡물상들이 장악하고 있어서 조그만 공급 감소에도 곡물 가격이 엄청나게 올라가는 현실에서, 이 정도의 자급률로는 우리의 생존이 위협받을 수도 있다. 농업이 최소한의 식량안보 기능조차 수행하지 못할 정도로 위축되어 있는 경제가 자주성을 가졌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3. 비생산적 경제활동을 조장하는 체질을 갖게 되었다.
우리가 소득을 얻을 수 있는 경제활동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사회에 무언가를 기여하고 그 대가로 소득을 얻는 활동이다. 예를 들면, 근로자가 회사에서 받는 임금은 그가 어떤 물건을 만드는 데 기여한 대가라고 할 수 있다. 기업을 경영하는 사장이 얻는 이윤도 마찬가지다. 이런 종류의 활동을 통해 얻는 소득은 그 가치에 해당되는 생산물이 어떤 형태로든 새롭게 창출된다는 의미에서 보통 ‘생산적’ 경제활동이라고 한다.
그러나 부동산 투기를 통해 돈을 번 경우에는, 비록 개인의 소득은 증가할 지 모르지만 사회적으로는 아무런 이득이 없다. 이미 존재하고 있던 부동산의 소유권만 바뀌었을 뿐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부동산의 양이 증가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사람의 소득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부동산 투기로 집값이나 전세금이 오르면 새로 집을 장만해야 할 사람이나 전세를 살고 있는 사람이 그만큼 더 부담해야 한다. 이들이 추가로 부담한 부분이 투기한 사람의 소득이 된 것이다.
또 다른 예로서 독점기업의 활동을 보자. 독점기업은 경쟁이 치열한 시장에서 활동하는 기업보다 더 많은 이윤을 얻는 것이 보통인데, 이를 ‘독점으로 인한 초과이윤’이라고 한다. 이 초과이윤은 정상적인 경우보다 가격을 높게 매김으로써 생긴다. 따라서 독점이윤은 소비자들이 누려야 할 몫을 기업으로 이전시킴으로써 생기는 소득이라 할 수 있다. 새로운 생산물을 창출하지 않고 단순히 다른 사람이 누려야 할 몫을 이전시킴으로써 돈을 버는 활동을 ‘비생산적’ 경제활동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비생산적 경제활동을 통해 얻는 소득은 큰 노력을 들이지 않고 얻는 ‘불로소득’인 경우가 많다. 물론 부동산 투기를 하려고 해도 정보를 수집하고 자금을 마련하는 등 노력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직장에서 땀 흘린 대가로 받는 월급과 비교해보면 노력에 비해 소득의 크기가 엄청나게 큰 것이 보통이다. 기업의 경우에도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여 이윤을 추구하기보다 독점적 지위를 이용하여 가격을 올리는 편이 훨씬 수월할 것이다.
우리 경제는 고도성정 과정에서 비생산적 경제활동을 추구할 여지가 많은 체질을 가지게 되었다. 그 요인은 대략 다음의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그 동안 물가가 계속 상승함으로써 물가는 언제나 오르는 것이라는 것이 하나의 상식처럼 되었는데, 이것을 경제용어로 ‘인플레 기대심리’라고 한다. 인플레이션이 예상되는 경제에서는 실물자산을 가지는 것이 유리하다. 따라서 인플레 기대심리가 뿌리박혀 있는 사회에서는 부동산 투기가 일반적인 현상이 되기 쉽다.
또 다른 하나는, 그간의 성장을 정부가 주도하는 과정에서 민간의 경제활동에 대해 각종 규제가 많아졌다는 점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기업이 어떤 사업을 수행하기 위해서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인가나 허가를 얻어야 하는 인·허가제도이다. 이 제도도 나름대로 필요해서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인·허가를 받은 기업은 이를 통해 시장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누리게 된다. 규제가 많은 경제에서는 특정 기업이 이를 이용하여 독점이윤을 추구할 기회가 많아지는 것이다.
이렇게 비생산적 경제활동을 추구할 여지가 많아서는 자생적 성장의 틀을 마련하기가 지극히 어렵다. 자생적 성장을 위해서는 독자적인 기술개발 능력을 갖추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비생산적 활동을 통해 손쉽게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곳곳에 널려 있는데 애써 기술을 개발하려는 기업이 어디에 있겠는가? 또 근로자들도 투기를 통해 불로소득을 추구할 기회가 많은데 굳이 땀 흘려 일하거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짜내려고 노력하겠는가?
1998, 《웅진밀레니엄북 - 현대 한국사회의 이해》, p147~156
1.대외의존도가 높은 경제구조를 초래하였다.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인 경제성장이 시작된 것은 1960년대 초반부터였다. 그러나 축적된 자본이 없는 상태에서 의욕적으로 고도성장을 추진하다 보니 외국자본을 도입하는 것은 필연적이었으며, 나아가 도입한 외국자본의 원리금을 상환하기 위해서 수출주도형 성장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전략이 당시 세계적으로 고조된 자유무역 분위기와 맞물려 크게 성공한 것은 앞의 글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시장수요의 상당부분을 수출, 즉 해외시장에 의존하게 되면 국내경제가 외국 경제상황에 따라 민감하게 변동하게 된다. 우리나라 수출의 절반 이상을 미국 시장에 의존하던 시절에는 ‘미국 경제가 재채기를 하면 한국 경제는 감기에 걸린다.’하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였다.
최근에는 국내시장 규모도 다소 커지고 수출대상국도 다변화되었지만, 아직도 국민총생산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율이 30%를 초과하고 있다. 이처럼 수출의존도가 높아서 경제가 해외경기에 따라 민감하게 변화하면, 그만큼 우리 경제에 대한 통제능력이 떨어지고 국제경제 관계에서 우리의 협상력이 약해지게 된다. 그 동안 미국과의 통화협상에서 종국에 가서는 양보하고 마는 것이라든지, 환율변동에 따라 경제상황이 민감하게 변동하는 모습 등은 그 전형적인 예이다. 이것은 결국 경제의 자주성이 떨어짐을 의미한다.
더욱이 우리나라의 수출은 기계설비와 기술을 외국에서 도입하고, 생산에 필요한 원료나 중간재도 역시 외국에서 도입하여, 저임금 노동력을 활용하여 최종제품을 만들어 이를 다시 수출하는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것을 보통 ‘가공무역형 수출’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수출의존도가 30%를 초과하고 있지만 수입의존도(국민총생산에 대비한 총수입액의 크기) 또한 30%를 초과하고 있으며, 총수입액 중에서 중간재와 자본재가 90% 이상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수출이 가공무역형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참고로 일본의 경우에는 총수입액에서 중간재와 자본재가 차지하는 비중이 75%에 불과하다.
이처럼 수출이 가공무역형으로 이루어지면 수출이 늘어달 때 수입도 함께 늘어난다. 이것을 보통 ‘수입유발형 수출 구조’라고 하는데, 이렇게 되면 수출이 경제활동에 미치는 파급효과도 적을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수출이 증가하면 수출부문에서 활동하는 기업의 생산규모가 증가한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이 기업이 필요로 하는 중간재나 기계를 생산하는 기업의 생산활동 규모를 증대시키며, 그 파급효과는 계속 다른 기업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연쇄적인 파급효과야말로 수출이 경제성장에 기여하게 되는 중요한 통로이다. 그런데 수출품의 제조에 필요한 중간재나 기계를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게 되면 수출이 경제성장에 미치는 파급효과는 그만큼 적어질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자본재나 중간재의 높은 해외의존도로 말미암아 수출을 선도부문으로 한 누적적 성장매커니즘이 자리잡기 어렵게 되었다는 것이다.
2. 부문간 불균형이 심화되었다
후진국의 경제개발 방식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균형성장 전략’이고 다른 하나는 ‘불균형성장 전략’이다. 균형성장 전략은 국민경제의 모든 부문이 골고루 성장하도록 국력을 안배하는 전략이고, 불균형성장 전략은 성장가능성과 파급효과가 가장 크다고 생각하는 부문에 국력을 집중하여 그 부문을 성장시키면서 그것의 파급효과에 따라 다른 부문을 개발하는 전략이다. 우리나라는 ‘수출주도형 공업화’라는 말이 시사하듯이 수출을 위한 공업부문에 집중하는 불균형성장 전략을 취해왔다. 그 결과 농업과 공업 간, 그리고 공업 내부에서도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격차가 크게 벌어지는 불균형이 나타나고 있다.
먼저 농업과 공업 간의 불균형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전체 산업에서 40% 이상의 비중을 차지하던 농림어업부문은 고도성장 과정에서 10% 이하로 축소되었다. 물론 성장을 위해서는 공업화가 유리하고, 그 과정에서 농업의 비중이 축소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농업과 공업이 상호유기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다는 점이다. 즉 공업부문이 성장하면서 농업부문의 잉여인력을 흡수하고, 이것이 농업부문의 생산성을 상승시킴으로써 다시 공업부문의 자본축적에 기여하는 상호작용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이러한 자연스러운 과정을 거치지 않고 농업을 희생시키면서 공업이 성장함으로써 양자간 균형이 과도하게 파괴된 데 문제가 있다. 공산품의 수출경쟁력이 저임금 노동의 활용에 바탕을 두고 있으므로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도시근로자의 생계비를 낮추지 않으면 안 되었고, 이를 위해서 곡물의 가격을 낮은 수준으로 묶어놓을 필요가 있었다. 곡물 가격을 정상가격보다 낮은 수준으로 억제하는 한 농업의 수익성이 떨어져 농업부문이 과도하게 위축될 수밖에 없다.
농업부문의 위축은 동시에 농촌의 몰락을 초래하였다. 오늘의 농촌 현실을 보자. 노인들만 사는 집이 반을 넘고, 어린애 울음소리가 끊긴 지 오래이며, 초등학교는 계속 폐쇄되고 있다. 한마디로 참담한 지경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농업소득이 저하되더라도 새로이 생성되는 공업부문을 농촌에 위치시켜 농외소득을 증대시키면, 농업이 위축되더라도 농촌은 살 수 있다. 그러나 그 동안 농외소득을 증가시키는 데도 실패함으로써 농업의 위축과 함께 농촌도 몰락하게 되었다. 농업의 위축과 농외소득 증대의 실패가 도시와 농촌의 불균형을 초래한 것이다.
공업 내부에서도 재벌 및 대기업의 성장과 중소기업의 위축이라는 또 다른 불균형이 나타나고 있다. 30대 재벌이 우리나라 광공업 총매출액의 40% 가까이를 차지하고 있는 반면에, 수적으로 보아 우리나라 기업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소기업은 제조업 총부가가치의 45%를 점유하는 데 그치고 있다. 경쟁력 있는 기업은 더욱 커지고 그렇지 못한 기업이 도태되는 것은 자본주의 경제의 일반적 현상이다. 따라서 경제성장 과정에서 대기업의 비중이 증대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미국이나 일본의 경우 중소기업이 제조업 총부가가치의 60% 가까이 차지하는 것을 볼 때, 우리나라 대기업·중소기업 간의 불균형은 그 정도가 지나치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대기업·중소기업 간에 불균형이 심화된 것은, 그 동안의 성장 과정에서 정부가 시행한 산업정책에 그 원인이 있다. 정부는 불균형성장 전략의 일환으로 특정산업을 전략산업으로 선정하여 집중적으로 지원하였다. 1960년대의 경공업과 1970년대의 중화학공업 및 해외건설업은 대표적인 전략산업이었다. 특히 이 과정에서 우리 정부는 그 산업을 담당할 기업까지 선별하였다. 여기서 선별된 기업은, 공장 건설에 필요한 차관자금에 대한 정부의 지불보증은 물론이고 국내은행에서 운전자금도 지원받을 수 있었다.
정부는 기업을 선별할 때 공평성을 고려하여 기존에 지원받지 않은 기업을 선정하기보다는, 안전성을 우선하여 과거 경영실적이 우수한 기업을 선정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급속한 성장 과정에서 새로운 산업이 속속 전략산업으로 등장하였고, 한번 성공한 기업은 계속해서 그 새로운 산업의 담당자로 선정되는 경향이 있었다. 오늘날의 재벌 및 대기업 위주의 경제구조, 달리 표현하면 중소기업이 취약한 경제구조는 이러한 과정을 거쳐 형성된 것이다.
이처럼 농업과 중소기업이 극도로 위축되어 산업간 불균형이 극심한 상태에서는 자생적 성장의 발판을 갖추기 어렵다. 그 이유는 다음의 세 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첫째, 중소기업이 약한 경제는 자생적 성장을 위한 독자적인 기술개발 능력을 가질 수 없다. 물론 대기업에서도 기술향상이 이루어질 수 있고 또 실제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외국의 경험을 보면 신기술이 개발되고 신제품이 착상되는 곳은 대기업도다는 중소기업이 많다. 실제로 미국의 경우 반도체, 컴퓨터, 소프트웨어 등 첨단기술의 발명은 실리콘밸리의 중소기업이 선도하고 있다. 또한 중소기업의 생성과 발전은 기업간 경쟁을 자극하여 기술개발 및 품질향상 노력을 가속화시키기도 한다.
둘째, 각 산업부문간의 유기적 관련을 통해 한 부문의 성장이 다른 부문의 성장을 유발하는 누적적 성장매커니즘을 기대할 수 없다. 자생적 성장의 길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공업의 성장이 농업의 성장을 유도하고 농업의 성장이 다시 공업의 성장으로 이어질 수 있어야 하며, 대기업의 성장이 중소기업의 성장을 유발하고 중소기업의 활력이 다시 대기업의 경쟁력을 향상시키는 누적적 성장매커니즘이 정착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셋째, 농업의 극심한 위축은 경제의 자주성을 해치게 된다. 1970년만 해도 80%에 달했던 식량자급률이 농촌의 피폐로 1992년에는 34.3%로 급격히 떨어졌고, 이러한 추세는 우루과이라운드의 타결로 농산물 수입이 증가하게 되면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농업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가 국민들에게 식량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일인데, 이것을 보통 농업의 ‘식량안보 기능’이라고 한다. 세계 곡물시장의 50%를 거대 곡물상들이 장악하고 있어서 조그만 공급 감소에도 곡물 가격이 엄청나게 올라가는 현실에서, 이 정도의 자급률로는 우리의 생존이 위협받을 수도 있다. 농업이 최소한의 식량안보 기능조차 수행하지 못할 정도로 위축되어 있는 경제가 자주성을 가졌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3. 비생산적 경제활동을 조장하는 체질을 갖게 되었다.
우리가 소득을 얻을 수 있는 경제활동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사회에 무언가를 기여하고 그 대가로 소득을 얻는 활동이다. 예를 들면, 근로자가 회사에서 받는 임금은 그가 어떤 물건을 만드는 데 기여한 대가라고 할 수 있다. 기업을 경영하는 사장이 얻는 이윤도 마찬가지다. 이런 종류의 활동을 통해 얻는 소득은 그 가치에 해당되는 생산물이 어떤 형태로든 새롭게 창출된다는 의미에서 보통 ‘생산적’ 경제활동이라고 한다.
그러나 부동산 투기를 통해 돈을 번 경우에는, 비록 개인의 소득은 증가할 지 모르지만 사회적으로는 아무런 이득이 없다. 이미 존재하고 있던 부동산의 소유권만 바뀌었을 뿐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부동산의 양이 증가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사람의 소득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부동산 투기로 집값이나 전세금이 오르면 새로 집을 장만해야 할 사람이나 전세를 살고 있는 사람이 그만큼 더 부담해야 한다. 이들이 추가로 부담한 부분이 투기한 사람의 소득이 된 것이다.
또 다른 예로서 독점기업의 활동을 보자. 독점기업은 경쟁이 치열한 시장에서 활동하는 기업보다 더 많은 이윤을 얻는 것이 보통인데, 이를 ‘독점으로 인한 초과이윤’이라고 한다. 이 초과이윤은 정상적인 경우보다 가격을 높게 매김으로써 생긴다. 따라서 독점이윤은 소비자들이 누려야 할 몫을 기업으로 이전시킴으로써 생기는 소득이라 할 수 있다. 새로운 생산물을 창출하지 않고 단순히 다른 사람이 누려야 할 몫을 이전시킴으로써 돈을 버는 활동을 ‘비생산적’ 경제활동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비생산적 경제활동을 통해 얻는 소득은 큰 노력을 들이지 않고 얻는 ‘불로소득’인 경우가 많다. 물론 부동산 투기를 하려고 해도 정보를 수집하고 자금을 마련하는 등 노력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직장에서 땀 흘린 대가로 받는 월급과 비교해보면 노력에 비해 소득의 크기가 엄청나게 큰 것이 보통이다. 기업의 경우에도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여 이윤을 추구하기보다 독점적 지위를 이용하여 가격을 올리는 편이 훨씬 수월할 것이다.
우리 경제는 고도성정 과정에서 비생산적 경제활동을 추구할 여지가 많은 체질을 가지게 되었다. 그 요인은 대략 다음의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그 동안 물가가 계속 상승함으로써 물가는 언제나 오르는 것이라는 것이 하나의 상식처럼 되었는데, 이것을 경제용어로 ‘인플레 기대심리’라고 한다. 인플레이션이 예상되는 경제에서는 실물자산을 가지는 것이 유리하다. 따라서 인플레 기대심리가 뿌리박혀 있는 사회에서는 부동산 투기가 일반적인 현상이 되기 쉽다.
또 다른 하나는, 그간의 성장을 정부가 주도하는 과정에서 민간의 경제활동에 대해 각종 규제가 많아졌다는 점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기업이 어떤 사업을 수행하기 위해서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인가나 허가를 얻어야 하는 인·허가제도이다. 이 제도도 나름대로 필요해서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인·허가를 받은 기업은 이를 통해 시장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누리게 된다. 규제가 많은 경제에서는 특정 기업이 이를 이용하여 독점이윤을 추구할 기회가 많아지는 것이다.
이렇게 비생산적 경제활동을 추구할 여지가 많아서는 자생적 성장의 틀을 마련하기가 지극히 어렵다. 자생적 성장을 위해서는 독자적인 기술개발 능력을 갖추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비생산적 활동을 통해 손쉽게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곳곳에 널려 있는데 애써 기술을 개발하려는 기업이 어디에 있겠는가? 또 근로자들도 투기를 통해 불로소득을 추구할 기회가 많은데 굳이 땀 흘려 일하거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짜내려고 노력하겠는가?
1998, 《웅진밀레니엄북 - 현대 한국사회의 이해》, p147~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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