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거리의 정체성
●●● 기술어구는……이름과 동의어가 아니다.
S. 크립케 〈이름과 필연〉
비트겐슈타인의 기술어구론에 대한 크립케의 비판. 요점은 이런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고유명사의 의미는 그 인물에 대한 기술(記述)의 총체다. 가령, ‘진중권’의 의미는 “독일에 가 박사학위도 못 따고 돌아와”, “그 분풀이로 유명인들을 공격해”, “제 이름을 날리고 돈을 버는” “인격 파탄자”(〈조선일보〉독자들), 혹은 “반동적 의지에 사로잡혀 자유주의를 배반한 전투적 자유주의자”(철학자 이진우), 혹은 “자기 분야에서 변변한 저서도 없이 평론가 행세를 하며” “검도 1단의 실력으로 검도 5단에게 대드는 지적 파파라치”(소설가 이문열)가 될 것이다. 이 정도의 기술어구들을 들으면 나를 아는 이들은 금방 내 얼굴을 떠올릴 게다. 반면 크립케는 고유명사의 의미가 기술어구의 총체로 환원될 수 없다고 본다. 즉 진중권이 설혹 자랑스레 박사학위를 따고 돌아와 제 본질을 배반하고 조신하게 처신하고 있어도, 그 ‘진중권’은 변함없이 1963년에 태어난 그 인간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나는 “사회적 관계의 총체”일까? 아니면 그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존재일까? 현재의 내 몸에서 그 모든 사회적 관계들을 걷어내면 고깃덩이만 남을 게다. 그렇다면 나는 사회적 관계의 망을 둘러쓴 양파일 뿐이다. 반면 크립케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기술어구로 표현되는 사회적 관계의 양파껍질을 다 벗겨도 ‘진중권’은 여전히 진중권이다. ‘진중권’은 단지 양파껍질의 합이 아니라, 그 껍질 아래에 깔려 있는 어떤 실체(?)다. ‘진중권’이라는 실체는 일단 태어나면 후에 성인이 되든, 개새끼가 되든 여전히 진중권이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말대로 그 실체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사회적 관계의 망 속에 들어가, 정체성을 갖게 된다. 이는 부정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사실. 그럼 문제는 딱 하나. ‘내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내가 얼마나 주체적 선택을 하느냐’이다.
내 몸을 감싸고 있는 정체성 중에 어떤 것은 내 선택에 의한 것이고, 어떤 것은 내 의사와 관계없이 주어진 것이다. 가령 나는 민주노동당의 ‘당원’이라는 정체성을 월 2만 원의 당비를 내는 조건으로 주체적으로 선택했고, 에어컨 선풍기를 들고 벨을 누른 보급소 직원 앞에서 ‘〈조선일보〉의 독자’라는 정체성을 갖기를 거부했다. 하지만 어떤 정체성은 내 의지에 관계없이 강요된다. 가령 ‘한국인’이라는 정체성. 내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건 내게 강제로 뒤집어씌워진다. 그렇게 강제적으로 부과된 정체성들 중에서 끔찍하게 싫은 게 있다. 김포시 북변동 동남 아파트 ‘민방우대원’이라는 것이다. 세상에 인간 진중권이 기껏 ‘민방우대원’이란다. 미치겠다.
이런 정체성을 뒤집어쓰고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얼마 전 서점에서 우연히 탁석산이라는 철학자(?)가 쓴 〈한국의 정체성〉과 〈한국의 주체성〉이라는 책을 보았다. 몇 페이지 들춰보고는 ‘으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정말 엽기적인 책으로, 이 책에 비하면 장기의 자유판매를 주장하는 공병호의 〈갈등하는 본능〉은 애교로 보일 정도다. 제3제국의 나치철학 이후로 전 세계에서 핵무장을 주장하는 유일한 철학자다. 어쨌든 한국인이라는 사람들은 정체성을 찾아도 개인적으로 찾는 게 아니라 이렇게 집단적으로 찾는다. 자신을 ‘한국’과 동일시한 다음, ‘한국의 정체성’을 찾는다. 그래서 제 정체성과 주체성을 찾아 기껏 ‘한국의 정체성’, ‘한국의 주체성’이나 찾는 것이리라. 심지어 이런 책이 ‘좋은 책’으로 추천까지 받는다.
그러잖아도 우리 사회는 강제성을 띤 정체성이 너무나 많다. 그래서 원치 않는데도 생존을 위해서 이러저러한 인간관계 속에 들어가 정체성을 뒤집어써야 할 경우가 너무나 많다.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라고 하는 마르크스의 심오한 말이 우리 사회에서는 좀 엉뚱한 것을 의미한다. 즉 자아의 형성이 주체성의 형성과 별 관계 없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제 주체성을 과감하게 버리고 자기를 끈적끈적한 인간관계의 망 속에 내던져 그 그물에 친친 얽매이는 것. 그것으로 한 인간의 자아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런 일을 잘할 때, 즉 ‘마당발’이 될 때 비로소 “사람이 됐다.”는 소리를 듣는다.
이는 명함에 온갖 직함을 줄줄이 찍어 돌리는 지역 유지나 의원 나리들만의 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적게 혹은 많게 쓸데없이 정체성을 불리는 이 ‘처세’의 도를 닦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 ‘처세’는 한갓 주관적 망상이 아니라 실제로 사회 속에서 객관적인 힘을 발휘한다.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우리 사회의 권력 형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을 꼽으면 지연·학연·혈연으로 형성되는 정체성을 들 수가 있다. 이 정체성은 어떻게 보면 자발적으로 맺어지는 것 같으나, 어떤 면에서 보면 강요된 것이기도 하다. 사실 나는 오늘 대학 동창회 초대장을 받아놓고 갈까 말까 망설이고 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라는 친구가 있다. 이 미디어 스타가 한국 사회에 대해 한마디 옳은 말을 한 게 있다. 그것은 한국 사회가 “저신뢰 사회”라는 것이다. 물론 한국놈들이 죄다 믿지 못할 놈이라는 뜻이 아니다. 한국에는 공적 영역에 대한 신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가령 정치, 경제, 언론 등 한국의 공적 영역에는 규칙에 대한 신뢰가 없다. ‘규칙’을 준수하다가는 자기만 병신된다. 예컨대 노무현 같은 ‘바보’는 원칙을 지키다 낙선의 고배를 마시고, 소득을 숨김 없이 신고한 어느 변호사는 세금 빼고 한 달에 달랑 150만 원을 손에 쥐고, 오동명 같은 기자는 양심을 지킨 죄로 회사에서 쫓겨난다. 이러니 누가 규칙을 지키겠는가?
‘법’은 윤리의 최소한만을 규정한다. 즉 패륜의 극단적 경우에만 법이 개입한다. 따라서 법이 허용하는 한계 내에도 윤리적으로 ‘해도 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이 존재한다. 그것을 가르는 것이 바로 규칙이고, 그 규칙을 지킬 때 인간은 위엄을 갖게 된다. 윤리적 판단을 접고, 오로지 법의 금지조항만을 피해 행동하는 것은 야쿠자의 철학, 우리 사회의 멘탈리티는 이 야쿠자의 철학을 닮았다. 최근 삼성 회장이 요리조리 피해 아들에게 변칙상속을 한 것이 발각되어 물의를 일으킨 바 있다. 물론 그는 법정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렇다고 그게 윤리적일까? 가질 만큼 가진 자까지 이런 식으로 세상을 산다. 여기에 바로 한국식 자본주의의 천박성이 있다.
공적 신뢰가 없는 사회에서 윤리나 규칙을 지키는 사람은 도태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이 불확실성의 세계에서 생존하는 방법을 찾게 된다. 이런 사회의 경쟁은 글자 그대로 생물학적 ‘생존 경쟁’, 거기서 살아남기 위해 민중이 짜낸 지혜가 바로 ‘패거리 문화’다. 한국의 공적 영역은 패거리에 의해 움직인다. 기업은 혈연을 기반으로 한 족벌 체제로 운영되고, 정치는 학연과 지연에 의해 결정된다. 군대도 마찬가지다. 우리 현대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하나회’라는 패거리를 생각해보라. 이런 환경에서 살아남으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혈연·지연·학연에 속해야 하고,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살 길을 도모해야 한다. ‘향우회’를 만들고, ‘동창회’를 만들고…….
패거리는 사조직인가, 공조직인가? 분명히 공적 영역에서 작동하는데 그 성격은 엄연히 사적이다. 한국이 ‘저신뢰 사회’라는 것은 곧 공사의 구별이 없음을 의미한다. 공적 영역이 사적 패거리에 좌우될 때, 경제는 제대로 기능하지 않고(족벌 경영의 비효율성), 정치는 후진화하며(소위 ‘계보 정치’나 ‘보스 정치’), 문화는 천박해진다(어느 유명한 비평가는 자기 사단에 속하는 제자들을 데리다와 푸코의 머리 위에 올려놓는 극진한 주례사 비평을 써주며 챙긴 바 있다). 다른 한편 공사의 불분명함은 사적 관계의 순수성마저 해친다. 패거리에 속한 이들은 정말로 사적으로 좋아해 거기에 모여 있는 게 아니다. 그 안에서 만인은 만인에 대한 수단일 뿐이다.
패거리에는 개인의 ‘주체성’도, 집단의 ‘사회성’도 없다. 패거리의 권력 구조는 패거리의 정체성을 위해 개인의 선택을 무시한다. 그 안에서 지켜야 할 개인 윤리는 아부와 맹종이다. 동시에 패거리의 목적은 사회성을 배반한다. 패거리라는 이익 집단은 공적 영역에서 부당 이득을 취하며 부당 권력을 행사한다. 물론 패거리도 집단이라 그 안에서 도덕이 있다. 가령 전두환을 싸고돌던 장세동의 숭고한 ‘의리’. ‘의리’는 개인이 공동체에 대해 갖는 사회적 책임감이 아니다. 사회의 목적은 어떻게 되든, 패거리의 이익을 지키는 것이다. 장세동 오빠의 의리에 감동을 먹던 강남 아줌마들. 이게 한국 중산층의 교양 수준이다. 패거리는 전형적인 야쿠자 문화. 유감스럽게도 우리 사회는 다소간 이 야쿠자 문화 위에 세워져 있다.
일본 야쿠자들이 좁은 폐쇄적 집단의 정체성을 넘어 그 이상의 숭고한 정체성을 가지려 할 때, 봉고차에 확성기 달고 다니며 길바닥을 시끄럽게 만드는 우익이 된다. 우리 사회에서도 패거리를 짓고 다니는 인간늑대들이 외치는 애국적 목소리 역시 시끄럽기 그지없다. 우연히 국적이 같은 골프 선수의 우승을 제 일처럼 기뻐하고, 우연히 국적이 같은 야구 선수가 던지는 공 하나에 전국이 떠들썩하다. 주체성이 없는 사람들은 이렇게 집단과의 동일시 속에서만 자아실현을 하는 법이다. 한편으로는 극단적인 이기주의, 다른 한편으로는 크고 작은 집단주의. 이 둘의 기괴한 결합이 평균적 한국인의 ‘정체성’이다. 즉 개성과 주체성이 없는 적나라한 이기주의자이면서도 동시에 사회적 연대나 책임을 모르는 집단주의자. 이게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한국인의 정체성은 패거리의 정체성이다. ‘에고’는 있어도 ‘주체’는 없다. 그리하여 제 조그만 이익을 지키는 데에는 남에게 질세라 악착같이 달려들어도, 정작 자기 견해를 얘기해보라고 하면 변변히 제 생각을 말로 풀어낼 줄 모른다. 우리 사회에는 ‘집단’은 있어도 ‘사회성’은 없다. 한국 사람들이 갖고 있다는 그 친절함은 정확하게 자기가 속하여 친분이 있는 집단의 동그라미에서 멈춘다. 그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일을 당하든, 평균적인 한국인은 그들에게 아무 연대의식도 느끼지 못한다. 슬프지만 그게 우리의 자화상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자화상을 지우려면 먼저 개인들이 지역·혈연·학연과 같은 마이크로 집단주의, ‘한국’, ‘한국인’, ‘한민족’ 어쩌구 하는 매크로 집단주의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집단에 함몰되는 것은 봉건적 주체(?)의 특성이다. 근대적 주체가 되려면 먼저 쓸데없이 자신을 원소로 포함시키려 달려드는 크고 작은 집단으로부터 자기를 지켜야 한다. 나아가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허위의식을 벗고 이 공허한 애국주의를 사회적 책임 및 사회적 연대의 의식으로 바꾸어야 한다. “해방된 개인의 자유로운 결사.” 해방된 개인은 패거리 속의 노예들과는 달리 주인이 되어 제 정체성을 주체적으로 선택한다. 그런 개인은 제 개성과 주체성을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사회적 책임감과 연대의식을 가질 수 있다.
이런 개인이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가능하다. 다만 인간관계의 점성이 높은 우리 사회에서 그렇게 사는 게 좀 피곤할 뿐이다. 푸코의 말대로 권력은 정말 도처에 있다.
- 2002, 《폭력과 상스러움》, 진중권, p244~251
S. 크립케 〈이름과 필연〉
비트겐슈타인의 기술어구론에 대한 크립케의 비판. 요점은 이런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고유명사의 의미는 그 인물에 대한 기술(記述)의 총체다. 가령, ‘진중권’의 의미는 “독일에 가 박사학위도 못 따고 돌아와”, “그 분풀이로 유명인들을 공격해”, “제 이름을 날리고 돈을 버는” “인격 파탄자”(〈조선일보〉독자들), 혹은 “반동적 의지에 사로잡혀 자유주의를 배반한 전투적 자유주의자”(철학자 이진우), 혹은 “자기 분야에서 변변한 저서도 없이 평론가 행세를 하며” “검도 1단의 실력으로 검도 5단에게 대드는 지적 파파라치”(소설가 이문열)가 될 것이다. 이 정도의 기술어구들을 들으면 나를 아는 이들은 금방 내 얼굴을 떠올릴 게다. 반면 크립케는 고유명사의 의미가 기술어구의 총체로 환원될 수 없다고 본다. 즉 진중권이 설혹 자랑스레 박사학위를 따고 돌아와 제 본질을 배반하고 조신하게 처신하고 있어도, 그 ‘진중권’은 변함없이 1963년에 태어난 그 인간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나는 “사회적 관계의 총체”일까? 아니면 그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존재일까? 현재의 내 몸에서 그 모든 사회적 관계들을 걷어내면 고깃덩이만 남을 게다. 그렇다면 나는 사회적 관계의 망을 둘러쓴 양파일 뿐이다. 반면 크립케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기술어구로 표현되는 사회적 관계의 양파껍질을 다 벗겨도 ‘진중권’은 여전히 진중권이다. ‘진중권’은 단지 양파껍질의 합이 아니라, 그 껍질 아래에 깔려 있는 어떤 실체(?)다. ‘진중권’이라는 실체는 일단 태어나면 후에 성인이 되든, 개새끼가 되든 여전히 진중권이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말대로 그 실체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사회적 관계의 망 속에 들어가, 정체성을 갖게 된다. 이는 부정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사실. 그럼 문제는 딱 하나. ‘내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내가 얼마나 주체적 선택을 하느냐’이다.
내 몸을 감싸고 있는 정체성 중에 어떤 것은 내 선택에 의한 것이고, 어떤 것은 내 의사와 관계없이 주어진 것이다. 가령 나는 민주노동당의 ‘당원’이라는 정체성을 월 2만 원의 당비를 내는 조건으로 주체적으로 선택했고, 에어컨 선풍기를 들고 벨을 누른 보급소 직원 앞에서 ‘〈조선일보〉의 독자’라는 정체성을 갖기를 거부했다. 하지만 어떤 정체성은 내 의지에 관계없이 강요된다. 가령 ‘한국인’이라는 정체성. 내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건 내게 강제로 뒤집어씌워진다. 그렇게 강제적으로 부과된 정체성들 중에서 끔찍하게 싫은 게 있다. 김포시 북변동 동남 아파트 ‘민방우대원’이라는 것이다. 세상에 인간 진중권이 기껏 ‘민방우대원’이란다. 미치겠다.
이런 정체성을 뒤집어쓰고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얼마 전 서점에서 우연히 탁석산이라는 철학자(?)가 쓴 〈한국의 정체성〉과 〈한국의 주체성〉이라는 책을 보았다. 몇 페이지 들춰보고는 ‘으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정말 엽기적인 책으로, 이 책에 비하면 장기의 자유판매를 주장하는 공병호의 〈갈등하는 본능〉은 애교로 보일 정도다. 제3제국의 나치철학 이후로 전 세계에서 핵무장을 주장하는 유일한 철학자다. 어쨌든 한국인이라는 사람들은 정체성을 찾아도 개인적으로 찾는 게 아니라 이렇게 집단적으로 찾는다. 자신을 ‘한국’과 동일시한 다음, ‘한국의 정체성’을 찾는다. 그래서 제 정체성과 주체성을 찾아 기껏 ‘한국의 정체성’, ‘한국의 주체성’이나 찾는 것이리라. 심지어 이런 책이 ‘좋은 책’으로 추천까지 받는다.
그러잖아도 우리 사회는 강제성을 띤 정체성이 너무나 많다. 그래서 원치 않는데도 생존을 위해서 이러저러한 인간관계 속에 들어가 정체성을 뒤집어써야 할 경우가 너무나 많다.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라고 하는 마르크스의 심오한 말이 우리 사회에서는 좀 엉뚱한 것을 의미한다. 즉 자아의 형성이 주체성의 형성과 별 관계 없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제 주체성을 과감하게 버리고 자기를 끈적끈적한 인간관계의 망 속에 내던져 그 그물에 친친 얽매이는 것. 그것으로 한 인간의 자아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런 일을 잘할 때, 즉 ‘마당발’이 될 때 비로소 “사람이 됐다.”는 소리를 듣는다.
이는 명함에 온갖 직함을 줄줄이 찍어 돌리는 지역 유지나 의원 나리들만의 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적게 혹은 많게 쓸데없이 정체성을 불리는 이 ‘처세’의 도를 닦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 ‘처세’는 한갓 주관적 망상이 아니라 실제로 사회 속에서 객관적인 힘을 발휘한다.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우리 사회의 권력 형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을 꼽으면 지연·학연·혈연으로 형성되는 정체성을 들 수가 있다. 이 정체성은 어떻게 보면 자발적으로 맺어지는 것 같으나, 어떤 면에서 보면 강요된 것이기도 하다. 사실 나는 오늘 대학 동창회 초대장을 받아놓고 갈까 말까 망설이고 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라는 친구가 있다. 이 미디어 스타가 한국 사회에 대해 한마디 옳은 말을 한 게 있다. 그것은 한국 사회가 “저신뢰 사회”라는 것이다. 물론 한국놈들이 죄다 믿지 못할 놈이라는 뜻이 아니다. 한국에는 공적 영역에 대한 신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가령 정치, 경제, 언론 등 한국의 공적 영역에는 규칙에 대한 신뢰가 없다. ‘규칙’을 준수하다가는 자기만 병신된다. 예컨대 노무현 같은 ‘바보’는 원칙을 지키다 낙선의 고배를 마시고, 소득을 숨김 없이 신고한 어느 변호사는 세금 빼고 한 달에 달랑 150만 원을 손에 쥐고, 오동명 같은 기자는 양심을 지킨 죄로 회사에서 쫓겨난다. 이러니 누가 규칙을 지키겠는가?
‘법’은 윤리의 최소한만을 규정한다. 즉 패륜의 극단적 경우에만 법이 개입한다. 따라서 법이 허용하는 한계 내에도 윤리적으로 ‘해도 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이 존재한다. 그것을 가르는 것이 바로 규칙이고, 그 규칙을 지킬 때 인간은 위엄을 갖게 된다. 윤리적 판단을 접고, 오로지 법의 금지조항만을 피해 행동하는 것은 야쿠자의 철학, 우리 사회의 멘탈리티는 이 야쿠자의 철학을 닮았다. 최근 삼성 회장이 요리조리 피해 아들에게 변칙상속을 한 것이 발각되어 물의를 일으킨 바 있다. 물론 그는 법정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렇다고 그게 윤리적일까? 가질 만큼 가진 자까지 이런 식으로 세상을 산다. 여기에 바로 한국식 자본주의의 천박성이 있다.
공적 신뢰가 없는 사회에서 윤리나 규칙을 지키는 사람은 도태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이 불확실성의 세계에서 생존하는 방법을 찾게 된다. 이런 사회의 경쟁은 글자 그대로 생물학적 ‘생존 경쟁’, 거기서 살아남기 위해 민중이 짜낸 지혜가 바로 ‘패거리 문화’다. 한국의 공적 영역은 패거리에 의해 움직인다. 기업은 혈연을 기반으로 한 족벌 체제로 운영되고, 정치는 학연과 지연에 의해 결정된다. 군대도 마찬가지다. 우리 현대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하나회’라는 패거리를 생각해보라. 이런 환경에서 살아남으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혈연·지연·학연에 속해야 하고,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살 길을 도모해야 한다. ‘향우회’를 만들고, ‘동창회’를 만들고…….
패거리는 사조직인가, 공조직인가? 분명히 공적 영역에서 작동하는데 그 성격은 엄연히 사적이다. 한국이 ‘저신뢰 사회’라는 것은 곧 공사의 구별이 없음을 의미한다. 공적 영역이 사적 패거리에 좌우될 때, 경제는 제대로 기능하지 않고(족벌 경영의 비효율성), 정치는 후진화하며(소위 ‘계보 정치’나 ‘보스 정치’), 문화는 천박해진다(어느 유명한 비평가는 자기 사단에 속하는 제자들을 데리다와 푸코의 머리 위에 올려놓는 극진한 주례사 비평을 써주며 챙긴 바 있다). 다른 한편 공사의 불분명함은 사적 관계의 순수성마저 해친다. 패거리에 속한 이들은 정말로 사적으로 좋아해 거기에 모여 있는 게 아니다. 그 안에서 만인은 만인에 대한 수단일 뿐이다.
패거리에는 개인의 ‘주체성’도, 집단의 ‘사회성’도 없다. 패거리의 권력 구조는 패거리의 정체성을 위해 개인의 선택을 무시한다. 그 안에서 지켜야 할 개인 윤리는 아부와 맹종이다. 동시에 패거리의 목적은 사회성을 배반한다. 패거리라는 이익 집단은 공적 영역에서 부당 이득을 취하며 부당 권력을 행사한다. 물론 패거리도 집단이라 그 안에서 도덕이 있다. 가령 전두환을 싸고돌던 장세동의 숭고한 ‘의리’. ‘의리’는 개인이 공동체에 대해 갖는 사회적 책임감이 아니다. 사회의 목적은 어떻게 되든, 패거리의 이익을 지키는 것이다. 장세동 오빠의 의리에 감동을 먹던 강남 아줌마들. 이게 한국 중산층의 교양 수준이다. 패거리는 전형적인 야쿠자 문화. 유감스럽게도 우리 사회는 다소간 이 야쿠자 문화 위에 세워져 있다.
일본 야쿠자들이 좁은 폐쇄적 집단의 정체성을 넘어 그 이상의 숭고한 정체성을 가지려 할 때, 봉고차에 확성기 달고 다니며 길바닥을 시끄럽게 만드는 우익이 된다. 우리 사회에서도 패거리를 짓고 다니는 인간늑대들이 외치는 애국적 목소리 역시 시끄럽기 그지없다. 우연히 국적이 같은 골프 선수의 우승을 제 일처럼 기뻐하고, 우연히 국적이 같은 야구 선수가 던지는 공 하나에 전국이 떠들썩하다. 주체성이 없는 사람들은 이렇게 집단과의 동일시 속에서만 자아실현을 하는 법이다. 한편으로는 극단적인 이기주의, 다른 한편으로는 크고 작은 집단주의. 이 둘의 기괴한 결합이 평균적 한국인의 ‘정체성’이다. 즉 개성과 주체성이 없는 적나라한 이기주의자이면서도 동시에 사회적 연대나 책임을 모르는 집단주의자. 이게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한국인의 정체성은 패거리의 정체성이다. ‘에고’는 있어도 ‘주체’는 없다. 그리하여 제 조그만 이익을 지키는 데에는 남에게 질세라 악착같이 달려들어도, 정작 자기 견해를 얘기해보라고 하면 변변히 제 생각을 말로 풀어낼 줄 모른다. 우리 사회에는 ‘집단’은 있어도 ‘사회성’은 없다. 한국 사람들이 갖고 있다는 그 친절함은 정확하게 자기가 속하여 친분이 있는 집단의 동그라미에서 멈춘다. 그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일을 당하든, 평균적인 한국인은 그들에게 아무 연대의식도 느끼지 못한다. 슬프지만 그게 우리의 자화상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자화상을 지우려면 먼저 개인들이 지역·혈연·학연과 같은 마이크로 집단주의, ‘한국’, ‘한국인’, ‘한민족’ 어쩌구 하는 매크로 집단주의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집단에 함몰되는 것은 봉건적 주체(?)의 특성이다. 근대적 주체가 되려면 먼저 쓸데없이 자신을 원소로 포함시키려 달려드는 크고 작은 집단으로부터 자기를 지켜야 한다. 나아가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허위의식을 벗고 이 공허한 애국주의를 사회적 책임 및 사회적 연대의 의식으로 바꾸어야 한다. “해방된 개인의 자유로운 결사.” 해방된 개인은 패거리 속의 노예들과는 달리 주인이 되어 제 정체성을 주체적으로 선택한다. 그런 개인은 제 개성과 주체성을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사회적 책임감과 연대의식을 가질 수 있다.
이런 개인이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가능하다. 다만 인간관계의 점성이 높은 우리 사회에서 그렇게 사는 게 좀 피곤할 뿐이다. 푸코의 말대로 권력은 정말 도처에 있다.
- 2002, 《폭력과 상스러움》, 진중권, p244~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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