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대를 위한 문법적 착각

 ●●● 문법적 착각에 의해 초래된 미신…….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철학은 문법적 착각의 문제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철학적 문제란 언어의 사용법을 착각하여 특정 영역에서만 타당한 어법을 마구 다른 영역에 옮겨놓음으로써 발생하는 요술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철학에 남은 과제가 있다면, “언어라는 수단으로 우리 오성에 걸린 마술과 싸우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다. 철학의 문제 자체가 문법의 착각에서 비롯된 가짜 문제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철학적 물음이 어떤 문법적 오류에서 비롯되었는지 보여줌으로써 그 문제 자체를 해소해버리는 것이리라. 그리하여 비트겐슈타인에게 철학은 오성에 걸린 마법을 언어적으로 ‘치유’하는 작업을 의미했다. 하지만 문법적 착각으로 인한 오성의 마법은 철학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이데올로기 역시 우리의 오성에 마법을 건다.

 가령 “나는 ……에 반대한다”는 표현의 문법을 보자. 종종 이 표현이 타당한 영역을 벗어나서 마구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가령 “나는 지하철 노동자의 파업에 반대한다.” 주위에서 흔히 듣는 말이다. 신문이나 방송에도 이런 어법은 심심찮게 등장한다. 그래서인지 별로 이상하게 들리지 않는다. 그럼 이 문장은 어떤가? “나는 지하철 노동자들이 투표를 하는 데 반대한다.” 이상하게 들리지 않는가? 내가 아는 한 파업과 투표는 헌법이 보장하는 시민의 권리다. 한법에 찬성했다면, 그로써 우리는 애초에 남의 권리 행사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하지 않기로 약속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들의 권리행사가 마치 무슨 사회악이나 되는 것처럼 궁시렁댄다. 심지어 어느 시민단체에서는 시민의 발을 볼모로 잡은 지하철 노동자들에게 빼앗긴 시민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민사소송을 준비했단다. 정말 엽기적인 일이다.

 그럼 이건 어떨까? “나는 지하철 노동자의 불법파업에 반대한다.” 역시 흔히 듣는 말이다. 말하자면 파업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으나 파업의 불법성에는 반대한다는 것이다. 이 역시 매우 당연하게 여겨진다.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나는 지하철 노동자의 불법투표에 반대한다.” 그러니까 선관위에 미리 투표 참가 신청서를 제출한 후, 투표일이 지난 다음에야 떨어질 투표 허가서를 받지 않고 불시에 대선이나 총선 투표장에 나타남으로써 선거 행정에 대(大)혼란을 야기한 노동자들의 불법투표. 이런 일도 있을 수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아직 웬만한 파업은 다 불법으로 간주되는 형편이다. 하여튼 재미있는 어법이다. ‘불법’이라는 말이 ‘파업’이라는 말과 무리 없이 결합하는 이 기괴함. 내가 아는 한 이는 한국어 특유의 기이한 통사론적 현상이다.

 이건 어떤가? “나는 여성들이 길에서 담배 피우는 데 반대한다.” 이 역시 흔히 듣는 말이다. 누구도 이런 발언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럼 이건 어떤가? “나는 남성들이 길에서 담배를 피우는 데 반대한다.” 이건 좀 이상하게 들릴 거다. 몇 년 전 신문임을 표방하는 신문을 참칭하는 어느 안보상업주의 광고지에 이 문제에 관한 찬반양론이 실렸다. 유난히 보수적인 신문사 편집진의 장난이었을까? 공교롭게도 공공장소에서 여성이 흡연할 권리에 반대한다는 주장을 편 것은 어느 여성이었다. 말하자면 여성을 공격하는 데 여성을 앞잡이로 내세운 것이다. 어쨌든 재미있는 현상이다. 남이 담배를 피건 말건, 자기들이 왜 참견을 하는 건지. 이런 게 찬반양론의 대상이 된다는 것, 이 역시 대한민국 고유의 언어 현상이다.

 이건 어떤가? “나는 여성이 ‘자기 성취를 위해 아기를 갖기를 거부’(이문열)하는 데 반대한다.” 이런 말을 공공연히 하는 분도 있다. 좀 이상하게 들리지 않는가? 이상하지 않다고? 그럼 이런 표현을 보자. “나는 남성이 자기 성취를 위해 아기를 갖기를 거부하는 데 반대한다.” 어떤가? 이건 대단히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또 이건 어떤가? “나는 여성이 자기 성취를 위해 아기를 더 낳기를 거부하는 데 반대한다.” 역시 좀 이상하게 들린다. 그럼 마지막으로 이건 어떤가? “나는 경상도 출신 어느 남성 소설가가 자기 성취라는 것 때문에 아기를 더 가질 수 있는데도 가족계획에 돌입하는 데 반대한다.” 재미있는 어법이다. 인류의 종자를 퍼뜨리는 게 여성의 자기 성취를 접어두어야 할 만큼 신성한 일이라면, 그 일은 남성에게도 신성해야 할 터이다. 여자에게든, 남자에게든, 남에게 자식을 가져라, 말아라 요구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주제넘은 짓이다.

 또 이건 어떨까? 나는 남자다. 그런데 누군가 옆에서 말한다. “나는 당신이 남자라는 데 반대한다.” 우습지 않은가? 그 누가 내 존재에 관한 자연적인 사실에 찬반을 표할 권리가 있단 말인가. 그럼 이건? 나는 이성애자다. 누군가 옆에서 말한다. “나는 당신이 이성애자라는 사실에 반대한다.” 이 역시 우습게 들린다. 이제 이를 동사적 표현으로 바꾸어보자. 나는 여자를 사랑한다. 그런데 누군가 말한다. “나는 당신이 여성을 사랑하는 데 반대한다.” 어떤가? 우습지 않은가? 도대체 내가 여성을 사랑하는데, 왜 남들이 주제넘게 거기에 찬반투표를 하고 앉았는가. 자, 그럼 마지막으로 이 문장은 어떤가? “나는 동성애에 반대한다.”

 남이 동성을 사랑하든, 이성을 사랑하든 내가 거기에 찬성하거나 반대해야 할 이유는 없다. 이런 것들은 ‘찬성’이나 ‘반대’라는 말이 유의미하게 사용될 수 있는 맥락이 아니다. 그걸 논의의 대상으로 삼아 찬반을 표하는 그 행위 자체가 해괴하고 괴상한 일이다. 나아가 타인의 법적 권리 행사, 존재의 자연적 사실에 대해 제3자들이 왈가왈부하는 것은 명백한 인권 침해다. 하지만 이렇게 남의 인권을 침해하는 어법이 우리 사회에서는 공공연이 통용되고, 하나도 이상하지 않게 여겨진다. 사회 자체가 보수 이데올로기의 마법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는 문법적 착각에서 비롯된 미신이다. 그리고 철학은 오성에 걸린 이 마법과의 투쟁이다.

 - 2002, 《폭력과 상스러움》, 진중권, p157~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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